그 당시 셋집에 세 사는 일은 흔한 일이라고 했다.
방 두 칸 있는 열 평 남짓한 아파트의 문간방.
그게 내가 기억하는 두 번째 우리집이다.
우리 가족이 세들어 살던 집엔 아이가 있었다. 나보다 한 두살 더 많은 남자애였다. 나는 종종 혼자 집에 있을 때가 있었다. 방 두 칸 집의 문간방에서 혼자 있었다. 그 남자애는 그 때마다 내가 있는 방문앞에 앉았다. 나가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화장실이 급해도 나는 나갈 수 없었다.
그 때부터 소변이 급해지면 몹시 불안해지는 증상이 생겼다. 그리고, 불안을 감추기 위해 화를 내게 되었다.
내게는 갑자기 신경질이 나는 두 가지 상황이 있다. 마음의 평화가 갑자기 깨지고 급발진 한다. 그 중 하나가 화장실. 또 하나는 배고픔이다. 화장실은 위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배고픔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 그저 타고난 식성과 식탐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나는 항상 양 손에 음식을 들고 먹고 있다.
가리지 않고 잘 먹는데다, 입 안 가득히 음식을 넣고 오물오물거린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면 항상 복스럽다,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다 라고 하셨다.
어린시절부터 늘 그런 말을 들었던 탓일까? 그냥 어른이 되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줄 알고 살았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나, 연애, 직업 이런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대학시절 남들이 취직하느라 바쁠 때, 나는 그냥 아무생각이 없었다.
부모님이 원하는대로, 아니 엄마가 원하는대로(라기 보다, 우유부단한 내가 엄마에게 묻고, 엄마가 말해주는대로) 살았다. 어린시절부터 우유부단했던 나는 엄마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다. 엄마는 강압적인 분은 아니셨다. 남편과 가족에게 헌신적인 분이셨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우리를 키우셨다. 교회에서도 신뢰받는 분이셨다. 그렇기에 선택과 판단을 할 상황에서, 나는 엄마에게 물어보는 것이 당연했다.
(아니, 어쩌면 엄마에게 미루고 있었던 것 같다. 안되면, 엄마탓하기 얼마나 좋은가!)
그렇다고 순종적인 아이는 아니었다. 하기 싫으면 절대 하지 않는 고집세고, 무뚝뚝한 아이였다. 애교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엄마, 아빠에게 웃으면서 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십번째 생일을 두 달여 앞둔 지금, 돌아보기를 해 본다. 돌아보기를 하면,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다.
-눈에 띄지 않게 구석에 있기를 좋아했던 아이.
-혼자서 유럽 배낭여행.(그 당시엔 파격적이었다.) - 첫번째 터닝포인트
-스물여섯에 시작한 두 번째 입시. - 내 의지로 선택한 첫번째 사건(??)
-두번째 대학입학. 그것도 H미대 입학- 내 의지로 이룬 첫번째 성과.
-대학생 신분으로 12년 살기 (그 중 4년이 휴학기간)
-세 아이의 엄마.
-아토피 세 아이를 위해 아파트 생활을 버리고 농촌으로 이사. - 두번째 터닝포인트
-학교 안가면 큰일나는 줄 알고 살던 소녀가, 세 아이 자유롭게 키운 것(공동육아, 8학군 학교, 시골학교, 대안학교, 홈스쿨링...) - 지나치게 세심한 돌봄과 자유방임의 육아
-자연상태 그대로의 텃밭 농사. 농사 관련 수료증
-스무살때부터 찾아오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한 수많은 방법들. 심리학 강의들, 책들, 자기계발서들, 영상들, 몇 년의 교육과정 듣기 등